글

세제 원리 — 때를 녹이는 게 아니라 말아 올려 붙든다

세제를 푼 물에 그릇을 담가 두기만 하면 기름기는 잘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같은 물에 넣고 수세미로 몇 번 문지르면 금세 미끄러운 느낌이 사라진다. 세제가 때를 녹인다면 담가 두는 시간이 길수록 잘 빠져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앞선 여덟 편은 물이 어디에 머무는가를 다뤘다. 여기서부터는 방향이 바뀐다. 무엇이 어떻게 떨어져 나가는가의 문제다. 이 글에서는 세제가 실제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왜 힘이 필요한지, 세제의 양은 무엇을 바꾸는지를 정리한다. 세제는 때를 녹이지 않는다 세제의 핵심 성분인 계면활성제는 물에 녹기 쉬운 친수성 부분과 기름에 녹기 쉬운 소수성 부분을 한 분자 안에 함께 가진 화합물이다. 한쪽은 물을 좋아하고 다른 쪽은 기름을 좋아하니, 이 분자는 물과 기름이 만나는 경계에 자리를 잡는다. 물 분자끼리는 서로 강하게 끌어당긴다. 그래서 물은 표면적을 줄이려 하고, 이 성질이 표면장력으로 나타난다. 계면활성제가 경계에 늘어서면 그 경계가 완화되어 표면장력이 약해진다. 물이 섬유 사이나 그릇 표면의 미세한 틈으로 더 잘 스며들 수 있게 되는 것이 여기서 시작된다. 그러니 세제가 하는 첫 번째 일은 때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물이 때에 닿을 수 있게 만드는 것 이다. 기름과 물이 서로를 밀어내는 한 세정은 시작조차 되지 않는다. 이 단계를 적시고 스며드는 과정으로 보면 이후가 이해된다. 계면활성제가 일을 시작하는 조건 한 분자에 물과 친한 부분이 있다 같은 분자에 기름과 친한 부분이 있다 물과 기름이 만나는 경계가 존재한다 ↓ 분자가 경계에 늘어서 표면장력이 약해진다 세정은 때를 공격하기 전에 물이 닿게 만드는 일에서 시작된다 때가 떨어져 나가는 두 가지 방식 표면에 붙은 기름때가 실제로 떨어지는 방식은 크게 둘로 설명된다. 하나는 유화이고 다른 하나는 말려 올라가는 방식이다. 말려 올라간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계면활성제가 때와 표면 사이로 파고들어 붙으면 때가 표면에...

배수구 냄새의 정체 — 물로 만든 마개가 사라질 때

며칠 집을 비웠다 돌아오면 유독 냄새가 심한 배수구가 있다. 그동안 아무것도 흘려보내지 않았으니 새로 더러워질 일이 없었는데도 그렇다. 자주 쓰는 배수구는 오히려 조용하다. 쓰지 않았을 때 더 심해진다는 점이 이 현상의 성격을 보여 준다. 냄새는 배수구가 더러워져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원래 막혀 있던 통로가 열려서 생긴다. 이 글에서는 그 통로를 막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경로로 사라지는지, 무엇을 보고 판단하면 되는지를 정리한다. 냄새를 막는 것은 뚜껑이 아니라 물이다 배수관은 결국 건물 밖의 하수 계통과 이어져 있다. 그 사이에 아무것도 없으면 관 속 공기가 그대로 실내로 올라온다. 이를 막기 위해 배관 입구나 중간에 트랩이라는 장치가 들어간다. 가장 흔한 방식은 관을 S자나 P자, U자 모양으로 구부려 그 굽은 부분에 물이 늘 고여 있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 고인 물을 봉수라고 부르고, 이 물이 관의 단면을 완전히 채워 공기의 길을 끊는다. 냄새를 막는 실체는 금속 뚜껑이나 고무 패킹이 아니라 물로 만든 마개 인 셈이다. 구부린 관 대신 판이나 고무링이 물의 무게로 열리고 닫히는 밸브형 트랩도 쓰인다. 구조가 작고 간단하지만, 탄성을 가진 부품이라 여러 해 쓰면 성능이 떨어지거나 고장이 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배수구 냄새는 위생 문제라기보다 차단 구조가 유지되고 있는가 의 문제가 된다. 냄새가 올라오지 않는 조건 배관의 굽은 부분에 물이 고여 있다 그 물이 관 단면을 완전히 막는다 쓸 때마다 새 물로 보충된다 ↓ 하수 계통의 공기가 실내로 올라오지 못한다 막는 실체는 뚜껑이 아니라 고여 있는 물이다 물마개는 어떤 방식으로 사라지는가 봉수가 없어지는 경로는 하나가 아니다. 원인이 다르면 나타나는 시점도 다르다. 첫째는 증발이다. 오래 쓰지 않으면 고여 있던 물이 그대로 말라 없어진다. 같은 양이라도 공기에 닿는 면적이 넓을수록 마르는 시간이 짧아진다.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화장실 습기, 빠져나갈 길보다 들어올 길이 먼저다

샤워를 마치고 환풍기를 몇 시간씩 돌려도 거울의 김이 늦게 걷히고 구석은 계속 축축한 집이 있다. 같은 힘의 환풍기를 단 옆집은 한 시간이면 마른다. 기계의 성능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차이다. 5편에서 환기가 성립하려면 나가는 자리뿐 아니라 들어오는 자리가 있어야 한다고 정리했다. 화장실은 이 조건이 가장 자주 어긋나는 공간이다. 이 글에서는 욕실이 어떤 환기 구조를 갖고 있는지, 문 하나가 왜 결과를 뒤집는지, 덕트 너머에서는 무슨 일이 있는지를 정리한다. 화장실은 배기만 있는 방이다 창이 없는 욕실은 대개 강제배기 방식으로 설계된다. 냄새와 습기를 팬으로 밀어내 공간을 주변보다 낮은 압력으로 만들고, 부족해진 공기는 옆에서 저절로 흘러들게 하는 구조다. 배기는 기계가 맡고 급기는 자연에 맡기는 셈이다. 여기서 흔한 오해가 생긴다. 환풍기가 습기를 '빨아들여 없앤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하는 일은 습한 공기를 밖으로 밀어내는 것뿐이다. 밀려 나간 만큼은 어디선가 채워져야 한다. 채울 공기가 없으면 팬은 계속 돌아도 실제로 나가는 양이 줄어든다. 주택 전체로 보면 이 원리가 법령에도 반영되어 있다. 신축하거나 리모델링하는 100세대 이상의 공동주택은 시간당 0.5회 이상의 환기가 이루어지도록 자연환기설비 또는 기계환기설비를 갖추게 되어 있다. 환기를 '창을 여는 습관'이 아니라 공기가 드나드는 경로 설계 의 문제로 다룬다는 뜻이다. 강제배기가 실제로 작동하는 조건 팬이 공기를 밖으로 밀어낸다 밀려 나간 만큼 들어올 자리가 있다 나가는 통로가 막혀 있지 않다 ↓ 욕실 공기가 새 공기로 교체된다 셋 중 하나만 빠져도 팬은 돌지만 배출량은 줄어든다 문틈이 사실상의 급기구다 욕실에는 급기구가 따로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문 아래의 틈이나 문에 뚫린 통풍구가 급기구 역할을 대신한다. 이 틈이 막히면 급기가 사라진다. 샤워 후 문을 꽉 닫고 환풍기만 돌리는 방식이 ...

제습제 원리 — 고체가 녹는 순간부터 흡수가 멈출 때까지

옷장에 넣어 둔 제습제를 한 달 뒤에 꺼내 보면 위칸의 하얀 알갱이는 줄어 있고 아래칸에는 물이 차 있다. 물을 넣은 적이 없는데 물이 생겼고, 넣어 둔 고체는 사라졌다. 앞 글에서 환기는 방 안의 공기를 통째로 바꾸는 일이라고 정리했다. 제습제는 정반대다. 공기는 그대로 둔 채 거기 섞여 있는 수증기만 덜어 낸다. 이 글에서는 그 일이 통 안에서 어떤 순서로 일어나는지, 언제 멈추는지, 그래서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정리한다. 물을 빨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녹는다 제습제 위칸에 든 하얀 알갱이는 대개 염화칼슘이다. 이 물질에는 조해성이라는 성질이 있다. 공기 중에 노출된 고체가 수분을 흡수하면서 스스로 녹는 현상을 말한다. 표현이 미묘하지만 차이가 크다. 스펀지처럼 물을 머금는 것이 아니라, 공기 중의 수증기를 끌어당겨 그 물에 자기 자신이 용해된다. 그래서 흡수가 진행될수록 고체는 줄고 그 자리에 진한 소금물이 생긴다. 통 아래에 고인 물은 순수한 물이 아니라 염화칼슘 수용액이다. 흡수량 자체도 상당하다. 염화칼슘은 자체 무게의 14배가 넘는 물을 흡수할 수 있다. 다만 이 값은 조건이 갖춰졌을 때의 상한이고, 실제로는 주변 습도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습도가 60%인 환경에서는 자체 무게만큼을 흡수하는 정도이고, 평균 온도 25~30℃에 상대습도 70%인 조건에서는 자기 무게의 200%에서 250%에 해당하는 수분을 흡수할 수 있다. 같은 제품을 같은 기간 두어도 어떤 곳에서는 물이 가득 차고 어떤 곳에서는 거의 그대로인 이유가 여기서 나온다. 제습제의 성능이 다른 것이 아니라 놓인 자리의 습도가 다른 것이다. 조해가 일어나는 조건 조해성을 가진 고체가 있다 공기가 그 표면에 닿는다 공기 중 수증기 압력이 고체 쪽보다 높다 ↓ 고체가 수분을 끌어당기며 스스로 녹아 수용액이 된다 빨아들여 머금는 것이 아니라 녹아서 액체가 되는 변화다 통 아래에 물이 고이는 순서 제습제 용기가 위아래 ...

환기 효과, 몇 분이 아니라 몇 번 바뀌었는가

창을 한참 열어 두었는데도 방 공기가 그대로인 날이 있다. 반대로 잠깐 열었을 뿐인데 확실히 달라지는 날도 있다. 같은 집, 같은 창인데 결과가 갈린다. 앞선 글들에서 습기 문제의 해답은 결국 '공기를 바꾸는 일'로 모였다. 그런데 창을 여는 행위가 곧 공기 교체는 아니다. 이 글에서는 환기가 성립하는 조건, 창 하나로는 왜 부족한지, 바깥 공기를 들일지 말지를 무엇으로 판단하는지를 정리한다. 환기의 단위는 시간이 아니라 교체 횟수다 환기를 얼마나 했는지 세는 기준은 시계가 아니다. 방 안의 공기가 통째로 몇 번 새 공기로 바뀌었는지가 기준이 된다. 공동주택의 기계환기 설비도 시간당 0.5회라는 환기 횟수를 기준으로 설계된다. 시간이 아니라 횟수로 말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같은 10분이라도 바뀐 공기의 양은 크게 다를 수 있다. 창을 얼마나 크게 열었는지, 바람이 지나갈 길이 있는지, 안팎의 온도차가 얼마인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창을 오래 열어 두었는데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다면, 시간이 짧아서가 아니라 교체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이산화탄소 농도가 실내 공기의 지표로 쓰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람이 있는 방에서 이산화탄소는 계속 나오는데, 공기가 바뀌지 않으면 그대로 쌓인다. 즉 농도는 오염 물질의 양이라기보다 공기가 얼마나 오래 갇혀 있었는가 를 보여 주는 눈금에 가깝다. 실내공기질 유지기준이 이산화탄소 1,000ppm 이하로 정해져 있고, 자연환기가 불가능해 설비에 의존하는 시설은 1,500ppm 이하로 완화되는 것도 이 눈금 위에서의 구분이다. 환기가 실제로 일어나는 조건 공기가 들어올 자리가 있다 공기가 나갈 자리가 따로 있다 둘 사이에 공기를 밀어 주는 차이가 있다 ↓ 방 안의 공기가 새 공기로 교체된다 하나라도 빠지면 창을 오래 열어도 교체량은 늘지 않는다 이산화탄소 농도가 가리키는 상태 바깥 대기 수준 약 400...

결로 원인은 온도차가 아니라 이슬점이다 — 창가가 먼저인 이유

겨울 아침에 창문만 젖어 있는 것을 보면 창이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같은 방의 안쪽 벽은 멀쩡하다. 방 전체의 습도는 같은데 물이 맺히는 자리만 정해져 있다. 이 차이는 습도가 아니라 표면 온도 에서 온다. 이 글에서는 결로가 일어나는 기준인 이슬점이 무엇인지, 왜 창가가 늘 먼저인지, 무엇을 먼저 손대야 하는지를 정리한다. 결로는 공기가 아니라 표면에서 일어난다 공기는 온도에 따라 머금을 수 있는 수증기의 양이 다르다. 어떤 공기를 계속 식히면 더 이상 머금지 못하는 지점이 오는데, 그 온도를 이슬점이라고 한다. 결로는 따뜻한 실내 공기가 차가운 창 유리와 만나 수증기가 응결하면서 생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일이 공기 중이 아니라 표면에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방 한가운데 공기는 이슬점보다 따뜻해서 아무 일도 없다. 그러다 이슬점보다 차가운 표면에 닿는 순간, 그 접촉면에서만 물이 된다. 그래서 결로를 두고 '습도가 높아서'라고만 설명하면 절반만 맞다. 같은 습도라도 이슬점보다 차가운 표면이 없으면 결로는 생기지 않는다. 조건은 둘이고, 둘이 만나는 자리가 정해져 있을 뿐이다. 결로가 생기는 조건 공기가 수증기를 머금고 있다 그보다 차가운 표면이 있다 표면 온도가 이슬점 아래로 내려간다 ↓ 수증기가 물로 바뀐다 공기 중이 아니라 표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왜 하필 창인가 집에서 바깥과 가장 가까운 면이 창이다. 벽에는 단열재가 들어가지만 유리와 창틀은 상대적으로 얇다. 단열바가 없는 금속 창호나 단열성이 낮은 유리는 외부 온도를 실내에 그대로 전달한다. 그 결과 실내에서 가장 차가운 표면이 되고, 이슬점 아래로 가장 먼저 내려간다. 방향도 영향을 준다. 북쪽에 면한 창은 겨울철 양지와 음지의 표면온도 차가 약 19℃에 이른다. 같은 집이라도 창마다 결로의 정도가 다른 이유가 여기 있다. 결로 발생 시점은 실내외 온도차, 상대습도, 창호와 유리의 열관류율에 따라 달...

곰팡이 조건은 셋뿐이다 — 온도·습도·영양분이 겹치는 자리

곰팡이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늘 같은 자리에서 생긴다. 창틀, 욕실 이음새, 붙박이장 뒤. 집 안 어디서나 균일하게 나타나지 않고 특정 지점에만 반복된다는 점이 실마리다. 포자는 사실상 어디에나 떠다닌다. 그러니 곰팡이가 생겼다는 것은 포자가 도착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자랄 조건이 갖춰졌다 는 뜻이다. 이 글에서는 그 조건이 무엇인지, 집 안 어디에서 겹치는지, 그래서 무엇을 끊는 것이 가장 확실한지를 정리한다. 조건은 세 가지뿐이다 곰팡이가 자라려면 온도와 습도와 영양분이 함께 있어야 한다. 하나라도 빠지면 포자가 있어도 발아하지 못한다. 온도부터 보면, 대부분의 곰팡이는 20~30℃에서 가장 잘 번식한다. 사람이 편하게 지내는 온도와 정확히 겹친다. 종류에 따라 0℃~40℃ 범위에서 생존하기도 하지만, 4℃ 이하에서 성장을 시작하는 곰팡이는 거의 없다. 냉장 보관이 통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습도는 조절 가능한 조건이다. 상대습도가 60% 이상이면 발생하기 쉬워지고, 30℃처럼 온도가 높을 때는 70%부터 번식이 시작된다. 온도가 높을수록 필요한 습도의 문턱도 함께 움직인다는 뜻이다. 영양분은 사실상 언제나 충족된다고 보는 편이 맞다. 벽지, 먼지, 옷감, 음식물처럼 유기물이면 대부분 먹이가 된다. 아무리 깨끗한 집이라도 먼지는 쌓인다. 곰팡이가 자라는 조건 온도가 맞는다 습기가 충분하다 먹을 유기물이 있다 ↓ 포자가 발아해 자란다 셋이 동시에 갖춰져야 한다. 하나만 끊어도 자라지 못한다 그래서 실제로 조절할 수 있는 것 세 조건 중 온도는 낮추기 어렵다. 사람이 살아야 하는 공간이라 곰팡이가 싫어하는 온도로 유지할 수 없다. 영양분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남는 것이 습도다. 곰팡이 대책이 결국 습기 관리로 수렴하는 이유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세 조건 중 사람이 실질적으로 손댈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기 때문 이다. 그리고 습도는 방 전체 평균으로...